병살타 치고 펑펑 울던 20살 영건은 17년이 지나 은사 앞에서 ‘한국시리즈 MVP’를 거머쥐고 활짝 웃었다 [KS 5차전]

[SPORTALKOREA] 한휘 기자= 17년 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병살타를 치고 펑펑 울던 20살의 어린 선수가 있다. 그로부터 긴 시간이 지났다. 고참이 된 그 선수는 이제 밝은 얼굴로 당당히 ‘MVP’ 팻말을 들어 올렸다.
LG 트윈스 김현수는 지난달 31일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린 2025 신한 SOL뱅크 KBO 한국시리즈 5차전 한화 이글스와의 원정 경기에 3번 타자-좌익수로 선발 출전해 4타수 3안타 1볼넷 2타점으로 펄펄 날았다.
1회 첫 타석부터 1사 2루 기회가 왔고, 한화 선발 투수 문동주의 3구 포크볼을 밀어내며 좌전 1타점 적시타를 터뜨렸다. LG에 선취점을 안기는 값진 안타였다. 3회에는 볼넷을 골라내며 오지환이 역전 희생플라이를 날리는 발판을 놓았다.

4회에 삼진으로 침묵한 김현수의 방망이는 6회에 다시 불을 뿜었다. 1사 2루에서 조동욱을 상대로 좌중간에 떨어지는 적시타를 날렸다. ‘살얼음판 리드’를 지키던 LG는 이 안타로 2점 차로 앞서나가게 됐다.
김현수는 8회에도 안타를 쳐낸 후 대주자 최원영과 교체되며 임무를 마쳤다. 경기는 LG의 4-1 승리로 종료. 시리즈 전적 4승 1패를 만든 LG가 한국시리즈 챔피언 타이틀을 2년 만에 다시 따냈다.

시리즈 MVP에 누가 선정될지 여러 예측이 오간 가운데, 김현수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김현수는 89표 가운데 무려 61표(득표율 68.5%)를 쓸어 담으며 앤더스 톨허스트(14표)와 박동원(10표) 등을 제치고 독보적인 지지율로 수상자로 선정됐다.
받고도 남을 성적이다. 김현수는 이번 한국시리즈 5경기에서 타율 0.529(17타수 9안타) 1홈런 8타점 OPS 1.342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냈다. 한국시리즈에서 10타석 이상 소화한 선수 가운데 타율 1위, 타점 공동 1위, OPS 1위를 기록했다.
1, 2차전에서 꾸준히 안타를 신고한 김현수는 3차전에서 코디 폰세를 상대로 홈런을 때려내며 본격적으로 방망이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전날(30일) 4차전에서도 9회 결승타 포함 3안타 3타점으로 펄펄 날며 데일리 MVP에 선정됐다.
5차전에서도 선취점과 쐐기점이 모두 김현수의 방망이에서 나오는 등, 이번 가을 LG 최고의 ‘클러치 히터’로 이름을 날렸다. 이를 인정받아 2006년 두산 베어스에서 프로 무대에 입문한 후 20번째 시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사실 김현수의 ‘가을’은 한때 악몽의 시간이었다. 주전으로 도약한 2007년에는 무난했으나 이듬해가 문제였다. 당시 김현수는 고작 만 20세의 나이에 정규시즌 타율 0.357 9홈런 89타점 OPS 0.963이라는 괴물 같은 활약을 펼쳐 리그 전체의 주목을 끌었다.
베이징 올림픽 한일전에서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날린 결승타를 비롯해 여러 임팩트 있는 모습을 남겼다. ‘타격 기계’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여기에 플레이오프에서도 맹타를 휘두르며 기대감을 키웠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타율 0.048(21타수 1안타) 1타점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남겼다. 특히 1승 3패로 벼랑 끝에 몰린 5차전 9회 말 1사 만루 기회에서 1-2-3 병살타를 쳐 두산의 우승 가능성을 손수 지웠다. 그리고 김현수는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그 후 김현수에게 ‘가을 바보’ 꼬리표는 지독하게 따라붙었다. 사실 두산이 14년 만에 우승을 차지한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 맹타를 휘두르며 달라진 모습을 드러낸 김현수다. 하지만 LG 이적 후에는 시리즈마다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 왔다.
2023년 LG가 29년의 한을 깨고 우승을 차지할 당시에도 김현수는 타율 0.238(21타수 5안타) 1홈런 7타점 OPS 0.667로 그리 인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여전히 적잖은 팬들의 뇌리에 김현수는 ‘가을에 약한 타자’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완전히 달랐다. 2년 전, 더 나아가 17년 전의 설움을 씻듯 시종일관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영양가도 높았다. 오스틴 딘이 침묵한 이번 시리즈에서 김현수가 미쳐 줬기에 LG가 5차전에서 우승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김현수가 펑펑 울던 17년 전, 당시 두산을 이끌던 김현수의 스승이 다름 아닌 김경문 한화 이글스 감독이다. 그리고 김현수와 김경문 감독이 동시에 한국시리즈 무대에 오른 마지막 해가 바로 2008년이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났다. 김현수는 상대 팀 감독으로 만나게 된 ‘은사’의 앞에 다시 섰다. 슬픔과 분함을 못 이겨 눈물을 흘리던 20세의 젊은 타자는, 17년이 지나 고참이 돼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고 비로소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사진=뉴스1, 뉴시스, LG 트윈스, 한화 이글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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